낙원을 얼핏 보여주는 곳
에스겔 36:3435
김순현 목사(여수 갈릴리교회)
‘비밀의 정원’ 조성기
‘좀 더 작게(smaller), 좀 더 느리게(slower), 좀 더 가난하게(more poor), 좀 더 불편하게(more inconvenient)’를 마음속 표어로 삼고, 외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생명과 평화의 주님으로 고백하며 ‘생명과 평화의 길을 걷는 녹색교회’를 갈릴리교회 표어로 걸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생명 긍정(yes to life)과 생명 살림, 생명과 생명이 어우러져 이루는 조화와 평화에 삶의 초점을 맞추어 온 지 열두 해가 되었습니다. 그 세월은 전 지구적 생태 위기의 시대에 창조세계의 보전을 위해 힘쓰는 삶, 생명을 살리고 돌보는 고품격 생활방식을 강조하고, 초록 땅별 지구를 좀 더 풍요로운 행성으로 복구하는 데 단순하고 소박한 삶만큼 바람직한 삶이 없음을 온 교우와 함께 갈무리한 세월이었습니다.
그 세월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증거가 바로 갈릴리교회의 ‘비밀의 정원’입니다. ‘비밀의 정원’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정원지기(κηπουρóς)의 모습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요 20:15)를 본받으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생명과 평화를 이야기하는 교회가 왜 정원을 일구어야 하는지, 교회가 낙원을 얼핏 보여주는 곳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교회가 지속 가능한 삶을 꿈꾸고 이야기하려면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를 자신의 존재로 생생히 증언하고, 정원 일(gardening)이야말로 우주의 가장 깊은 신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일(토머스 베리, Gardening is an active participation in the deepest mysteries of the universe)임을 알록달록 오색 빛깔과 깊고 그윽한 향기로 묵묵히 일깨우고 있습니다.
열두 해 전 이 정원을 처음 일구던 때가 떠오르는군요. 목회 초입부터 줄곧 나무 심고 꽃 가꾸기를 즐겨하며 창조 영성의 샘물을 마셔온 몸이니, 생명의 주님을 본받아 대지(大地)와 동무하고, 대지에서 자라는 생명을 알아야만 생명에 대해, 그리고 생명과 생명이 어우러져 이루는 조화와 평화에 대해 실답게 말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게다가 갈릴리교회는 주님이 제게 맡겨주신 주님의 밭(ager Domini)이니까요. 이 밭을 낙원을 얼핏 (맛)보여주는 정원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의 입술을 통해 하신 말씀 그대로 하고 싶었습니다. “이전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황폐한 땅을 보며 지나다녔으나, 이제는 그곳이 묵어 있지 않고, 오히려 잘 경작된 밭이 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황폐하던 바로 그 땅이 이제는 에덴 동산(the garden of Eden)처럼 되었다고 할 것이다”(겔 36:3435). 벌과 나비와 새와 사람 등 온갖 숨탄것이 찾아와 생명과 평화의 환희에 젖어드는 정원으로 만들기!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에덴 프로젝트(Eden project)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저는 하나님 나라에 반드시 있을 만한 것 가운데 하나가 정원이며, 유대교와 기독교의 기원적 토대도 에덴 정원이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모든 정원은 우리에게 낙원을 맛보여주는 잠재력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습니다. 낙원 맛보기가 가능하려면, 누군가가 정원을 일구기 위해 수고하며 이마의 땀방울을 흘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조금의 고투라도 없으면, 환희는 있을 수 없으니 말입니다. 그 환희를 경험하기 위해 수고의 땀방울을 아끼지 않는 정원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제가 부임하던 당시 갈릴리교회에는 텃밭이 딸려 있었습니다. 150평 규모의 텃밭을 교우들 세 가정이 갈라서 부치고 있었습니다. 그 교우들은 저마다 자기 소유의 논과 밭을 일구고 있는 분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에게 양해를 구했습니다. “목사도 흙을 알고, 생명을 알아야 하니, 이제부터는 제가 교회 텃밭을 관리해 보렵니다. 꽃도 심고 정원수도 심어 아름다운 정원으로 가꾸어 보렵니다.” 그리하여 갈릴리교회 텃밭은 정원으로 변모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정원을 일구기 시작하자, 버거운 난제로 다가오는 것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축대용 돌들 확보하기, 축대 쌓기, 화단과 화단 사이에 통로 만들기, 화단에 투입할 흙 확보하기, 기존의 밭에 무수히 자리한 잡석 골라내기, 해마다 무성히 자라나는 잡초 제거하기, 너른 화단에 식재할 화목(花木)과 화초 입수하기, 짬짬이 재배법과 번식법 익히기 등등. 하나같이 엄청난 노동력과 땀방울과 비용을 요구하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십여 년이 넘도록 지치지 않고 비밀의 정원을 일구며 정원사로 자칭하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생명의 주님을 닮고자 하는 열의에 주님이 베풀어주신 크나큰 은총이 아닐까 싶습니다.
생명의 주님 닮기
저는 믿음살이란 생명의 주님을 닮아가는 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생명의 주님을 닮아갈 수 있을까요? 제 경험에 비추어 말씀드리면, 정원사의 길을 걷는 것으로 주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정원사의 길을 걷는 것이야말로 모든 사람, 특히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차적 성소(聖召)라고 힘주어 말하곤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손수 창조하신 아담을 데려다가, 손수 조성하신 에덴에 두시고, 그곳을 맡아 돌보게 하셨습니다(창 2:15). 인류의 대명사 아담에게 부여되었던 것이니만큼, 정원사의 길은 모든 인간이 가장 우선적으로 회복하고 걸어야 할 참으로 바람직한 길임에 틀림없습니다. 윌리엄 템플 경은 정원사의 길이 얼마나 바람직한 길인지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가 성서를 믿는다면,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정원을 일구는 사람의 삶을 가장 행복한 삶으로 여기셨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분은 아담을 에덴 한가운데 두지 않으셨을 것이다.” 우리 시대에 가장 절실한 소임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정원사의 소임을 꼽습니다. 그 소임을 외면하거나 무시했을 때, 우주를 구성하는 생명들에게 어떤 재앙이 닥칠지 눈에 선하기 때문입니다.
정원사의 길은 생명의 주님을 닮아가는 지름길입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요한복음 19:4142 말씀대로, 생명의 주님은 정원에 자리한 무덤에 묻히셨고, 요한복음 20:15 말씀대로 정원사의 모습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개역과 새번역성경은 동산과 동산지기로 번역하고 있지만, 원어성경에 기록된 ‘케포스’κῆπος의 정확한 번역어는 ‘정원’이고, ‘케푸로스’κηπουρóς의 제대로 된 번역어는 ‘정원사’입니다. 이 사실에 유의해서 말하건대, 정원사의 모습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모든 정원사 가운데 으뜸 정원사이시며, ‘정원사’는 그리스도론적 칭호 가운데 넘버원이라고 하겠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대단히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입니다. 17세기 영국 시인 롤런드 왓킨스(Rowland Watkyns)의 <정원사>라는 제목의 시가 떠오릅니다.
마리아는 하루 종일 무덤을 지키네. 서서 울기도 하고,
예수께서 누워 계시던 무덤 속을 들여다보기도 하면서.
찾고 있던 분을 찾았건만,
알아보지 못하네,
주님의 얼굴을.
그분은 이제 정원사이신 것을.
14세기 영국 수도자 노리치의 줄리안(Julian of Norwich)은 부활하신 주님을 환시(幻視) 중에 보고 그분이 하시는 일을 다음과 같이 생생히 묘사합니다.
나는 주인이 상석에 앉아 있고, 종이 그 주인 앞에 공손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 외견상, 그(종)는 일할 준비가 된 일꾼의 차림을 하고서 주인 가까이 서 있었습니다. … 그는 낡아서 군데군데 해진 가운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몸에서 나는 땀에 전 채 너무 꽉 조여서 바스러지기 쉬운 상태였습니다. 그의 무릎 아래 한 뼘 가량은 곧 닳아 없어질 것처럼 올이 드러나 보였습니다. 당장이라도 누더기가 되어 찢어질 것처럼 보였습니다. … 그의 지혜는 주인을 기쁘게 해드릴 만한 일이 하나 있음을 속으로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자신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 주인이 보내자, 그는 곧장 밖으로 내달렸습니다. … 대지에는 주인이 사랑하는 보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 그는 대단히 멋지고 대단히 어려운 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정원사가 되어 땅을 파고, 도랑을 내고, 땀을 흘리고, … 때를 따라 초목들에게 물을 주려고 했습니다. 그는 고생을 참아가면서 냇물이 졸졸졸 흐르게 하고, 당도 높은 열매가 많이 열리게 하려고 애썼습니다. _[Showings], the fifty-first chapter에서.
뭇 생명이 조화를 이루는 세상, 곧 생명 세상을 만드는 길은 실로 다양하지만, 정원사의 길만큼 생명의 주님을 닮아가는 데, 생명 세상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한 가지(참고. 눅 10:42)도 없는 것 같습니다. 정원은 생명과 생명이 조화를 이루는 낙원의 상징이자, 우리가 잃어버렸다가 물려받게 될 완벽한 고향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명 긍정과 생명 살림이 왕성히 이루어지고, 생명과 생명의 어우러짐이 이루어지는 정원을 일구고 가꾸는 것만큼 생명과 평화를 힘차게 알리고 증언해야 하는 교회에 바람직한 일은 없다고 하겠습니다.
정원이 주는 유익
정원은 그것을 일구는 사람에게 싱그럽고 생명력 넘치는 통찰력의 보고(寶庫)가 되기도 합니다. 정원에서 자라는 각양각색의 생명은 설교단에서 전하는 설교자의 메시지를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메신저이기도 합니다. 설교자가 정원 일에 힘쓰면, 정원은 설교자의 내면을 풍요롭게 해줄 뿐 아니라, 설교자의 언어도 신선하게 해줍니다. 흙을 만지며 몸으로 익혀가는 생명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밖에도 정원은 무수한 숨탄것을 불러 모읍니다. 벌과 나비들, 갖가지 새들, 양서류들, 그리고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사람들까지 불러 모읍니다. 정원 일에 힘쓰는 설교자는 탐방객을 맞이하는 즐거움도 덤으로 얻습니다. 예컨대 국립수목원에서 2016년에 펴낸 [가보고 싶은 정원 100]에 선정될 만큼 저희 갈릴리교회 비밀의 정원이 아름답다는 소문이 퍼져 해가 갈수록 방문객이 늘고 있습니다. 교회가 문턱을 낮추기 쉽지 않은 요즘, 빈부·종교·교단·이념을 불문하고 방문객이 꾸준히 늘고 있다는 것은 감사하게도 갈릴리교회의 문턱이 현저히 낮아졌음을 반증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방문객들의 반응은 거개가 놀람과 감탄 일색입니다. “와아! 야아! 어머나! 어머머! 아름답다!” 목사의 설교로 그런 놀람과 감탄을 자아내기는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요. 저마다 마음에 드는 꽃들을 카메라에 담거나, 꽃들을 배경으로 자신들의 모습을 담거나, 향기로운 꽃숭어리에 코를 갖다 대고 킁킁거리는 방문객들의 얼굴이 더없이 환합니다. 정성껏 가꾸어 개방한 정원 하나만으로도 교회는 사람들에게 경이로움과 기쁨, 곧 ‘아하 체험’을 너끈히 안겨줄 수 있습니다. 탐방을 마치고 돌아갈 때면, 방문객들의 찬사가 이어집니다. “정원사님, 멋져요. 정원사님, 고마워요. 덕분에 어둡던 마음을 치유하고 가요. 떠나고 싶지 않아요. 또 와도 되죠?” 탐방객들 중에는 아예 교회에 등록하는 이들까지 있습니다. 지금 저희 갈릴리교회는, 교회가 위치한 계동 지역(어촌 지역) 주민 외에도 여수 시내에서 여섯 가정, 순천에서 세 가정, 곡성에서 두 가정이 예배에 출석하는데, 이들을 갈릴리교회에 정착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이 바로 정원이라고 하겠습니다.
저는 모름지기 교회는 낙원을 얼핏 보여주는 곳이 되어야 하며, 그 방법 가운데 하나가 정원을 일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두서없이 말씀드렸습니다만, 모쪼록 힘써 정원을 일구고, 정원사의 모습으로 부활하신 생명의 주님을 닮아가며, 교회로 통칭하는 주님의 밭을 낙원을 얼핏 보여주는 곳으로 만들어 가시기를 바라며, 파울로 코엘료가 소개한 작자 미상의 글귀를 읽는 것으로 글을 마치겠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삶에서 두 가지 태도를 취할 수 있다고 합니다. 건물을 세우거나, 혹은 정원을 일구거나. 건물을 세우는 사람들은 그 일에 몇 년이라는 세월을 바치기도 하지만, 결국 언젠가는 그 일을 끝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일을 마치는 순간, 그는 자신이 쌓아올린 벽 안에 갇히게 됩니다. 건물을 세우는 일이 끝나면, 그 삶은 의미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원을 일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몰아치는 폭풍우와 끊임없이 변화하는 계절에 맞서 늘 고생하고 쉴 틈이 없습니다. 하지만 건물과는 달리 정원은 결코 성장을 멈추지 않습니다. 또한 정원은 그것을 일구는 사람의 관심을 요구하는 동시에 그의 삶에 위대한 모험이 함께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정원을 일구는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봅니다. 그들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식물 한 포기 한 포기의 역사 속에 온 세상의 성장이 깃들어 있음을._[브리다]의 서(序)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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