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숲과 일상>
남금란(가정폭력피해자보호시설 원장)
제가 이 곳 북한산 아래 이사 온 것은 약 2년 되었습니다.
여기는 북한산 생태 숲이 조성되어 있고 북한산 둘레길 4구간 솔샘 길이 지나는데다가 소나무 숲길에 데크 길을 깔아놓아 누구나 쉽게 다니며 마음껏 피톤치트를 들이마시며 그네며 해먹, 나무 벤치와 대청마루들이 군데군데 자리 잡아 다니는 길을 편리하게 조성해 놓았습니다. 주민들의 집과 숲길이 몸의 핏줄처럼 연결되어 있어 5분이면 이 숲에 닿을 수 있습니다.
야생화 정원에 개천도 있고 예쁜 물고기들이 노는 연못과 물레방아에 철마다 꽃과 나무가 색을 달리하여 마음에 온갖 감흥을 더하여 처음 이 곳에 왔을 때 ‘에덴동산이 바로 여기구나’ 싶었습니다. 이곳에 놀러 온 아이들 산책 나온 주민들이 모두 천사 같아 보였고 이곳에서는 감히 나쁜 생각이 떠오르질 않을 것만 같아 마음도 착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집값도 싼 서민의 동네인데 이렇게 하나님과 서울시가 이런 아름다운 북한산 정원과 숲을 거저 주시니 진짜 이 나라가 좋았습니다. 세상에 아름다운 산들이 너무도 많지만 멀리서 보기는 좋아도 우리나라처럼 이렇게 사람이 산에 깃들어 가까이 삶을 공유하는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저희 시설은 입소인들의 치료회복을 중점적으로 하는 곳입니다. 가까이에 북한산과 홍릉 숲이 있어서 자주 찾습니다. 저희 시설에 자폐를 가진 어린 아이도 산에 오면 다른 아이들과 별반 다를 것 없이 잘 뛰어놀고 자연의 모든 것에 정상적으로 반응합니다. 숲이 주는 기운을 아이는 알고 있는 듯 하고 숲이 자신을 사랑함을 느끼는 것만 같습니다. 과잉행동장애를 가진 아이들도 숲에서 마구 뛰어다니다가 넓은 풀밭에 덜렁 누워 “아! 좋다”라고 합니다. 그동안 학교라는 좁은 공간, 언제나 자신을 제약하는 도시의 공간 속에서 억눌린 감정을 마구 풀어내고 ‘마치 여기가 내 에너지에 잘 맞는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학교에서 집중력이 떨어진다는 어떤 아이는 숲에서 만나는 땅의 지렁이나 물의 피라미를 유심히 관찰하며 그 움직임에 집중하는 것이 놀랍니다. 모든 아이가 다 똑같은 사물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제각지 자기 관심사가 다를 뿐이란 것을 알게 됩니다. 아이들이 문제가 아니라 아이들을 언제나 이 제도와 틀에 맞추라고 어른들은 말합니다. ‘그런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틀로서 아이들을 평가해서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을 갈라 놓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숲에서는 차별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똑 같은 아이들일 뿐이고 거기는 문제아 우등아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저희는 자주 숲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온갖 길들인 생명을 아낌없이 차별 없이 나누어주며 큰 팔 벌려 온갖 목숨붙이들을 품어 안아 기르는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키 큰 나무들은 위로부터 태양을 받아 하나님의 뜻이 흐르는 통로가 되듯 하늘의 뜻이 우리 영혼을 타고 흐르는 통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숲속에서는 땅과 하늘과 물과 바람 모든 것이 하나가 되듯 우리도 모습은 서로 다르나 모두 하나가 되는 것을 배우며 기도합니다. 이와 같이 숲속에서는 기도와 침묵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어느 날 제가 똑 같은 안개꽃 화분 2개를 샀습니다. 그런데 한 개의 화분에서는 조금씩 꽃이 지더니 잎만 남았습니다. 저는 그 화분을 더 애지중지 보살피며 “너는 왜 못 피는 거니? 내가 이렇게 너를 더 살펴주는데, 햇빛과 바람과 물과 흙은 똑 같이 받으면서 너는 왜 그러니?”하면서 조바심을 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꽃을 바라보는 제 마음이 바뀌어서 “내가 모르는 속 뿌리에선 내 모를 일이 있을거야, 너도 예쁘구나. 너희 둘을 비교하는 마음 그치마”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다음 날 꽃이 피기 시작하여 그 다음 날은 온통 화분이 꽃으로 만발하였습니다. 생명인 꽃도 사람의 말을 듣고 있나 봅니다. 우리가 서로를 비교하고 판단하며 간섭과 잔소리를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닌가 봅니다. 과잉보호 했을 뿐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고유함을 인정하고 판단과 비교를 그쳤을 때 꽃은 자신만의 꽃으로 활짝 피어나는 것은 마치 인간 생명의 성장과도 같다 싶었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대할 때나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의 마음이 어떠해야 함을 가르쳐 준 식물의 가르침입니다.
어느 날은 다 죽은 다알리아 화분을 아쉬워하며 버린 적이 있습니다. 한 일주이나 지났을까? 화분에서 싹이 나서 가지가 자라다가 위가 막혀 있자 허리를 구부려서 해가 비치는 쪽으로 목숨 줄을 잡더니 다시 휘어졌다가 힘껏 올라와서는 어여쁜 빨간 꽃을 피우고는 환히 웃었습니다. 쉴 새 없던 물기에 썩어가던 뿌리를 햇빛이 곱게 어루만지고 바람이 상상 말려주니까 나머지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내었던 것입니다. 나와 함께 한 기억을 사랑이라 하고 용기로 삼아 죽음을 이겨내었던 것이 아일까? 우리 시설 분들이 아주 연약해 보이는 꽃 한 송이에서 희망과 용기를 크게 얻었습니다. 이렇게 일상의 작은 부분에서도 꽃과 나무는 우리들을 깨우치는 스승이기도 하다. 행복도 이렇게 아주 가까이에 있는 것입니다. 내 어릴 적에는 집 앞 낙동강에서 내내 살았습니다. 모래사장 옆 미루나무 숲에서 그네를 타며 바람을 만나고 밤의 강물에서 별빛엔지 강물엔지 몸을 씻으며 캄캄한 물 위에는 별빛만이 쏟아지는 강가에서 재잘거리면 그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고 동네 아이들과 아버지의 손을 잡고 집에 돌아오곤 했습니다. 제 아들도 어린 시절 과천의 계곡에서 놀 때 물고기가 돌과 바위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물고기가 각자 자기 색깔의 집으로 찾아 들어 가네”하고 시를 짓곤 해서 절로 꼬마시인이 되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중학교 때는 학교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이 과일이 열리면 우리 엄마를 줄 거예요”하고 입만 열며 그 말을 해서 대안학교에서 소문난 효자소리를 들었다. 나는 말 안 듣는 아들인줄만 알았는데 사춘기 아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엄마를 많이 사랑하고 있구나’를 알고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 아들은 지금도 효자입니다. 요즘 아이들의 양육자는 스마트폰 동영상이 되고 청소년들이 게임천국에서 살아가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자연의 품이 큰 부모이며 스승인 것을...
흙이 있기만 하면 풀은 뿌리를 내립니다. 풀이 있기만 하면 흙은 비바람에 견딥니다. 비가 풀들을 적시면 해는 어루만져 몸을 말려주고 나무는 숨을 토해냅니다. 바람은 그 숨을 실어 나르고 땅은 먹을거리를 낳아줍니다. 그 풀과 숨을 이 세상의 모든 목숨붙이들이 나눠 먹고 마시다가 다시금 나무에게 주고 언젠가 모두는 다시 흙이 됩니다. 그래서 숲에 오면 모든 마음은 닮아 있고 모든 생명이 하나임을 배웁니다.
숲이 살아 있는 모든 이들에게 생명의 숨소리를 전하는 것은 흙으로 돌아간 이들의 감사한 마음, 겸손의 마음, 용서의 마음이 있어 꽃과 나무에 향기를 부여하고 내 의식을 정화하여 호흡을 편하게 하는 듯하다. 숲에 깃든 착한 이들의 마음, 숲에 깃든 하늘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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