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17 살림컬럼
인류세와 기독교신앙
(faith in the anthropocene epoch)
김신영 / 목사, 기독교환경교육센터 살림코디네이터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45억 년 전 지구가 탄생하고 인류가 지구에 등장한지 20만년이 흘렀다. 지질학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세를 홀로세(Holocene)라고 부른다. 홀로세는 신생대 4기에 속하며 마지막 빙기가 끝난 약 1만 년 전부터 현재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하지만 인류가 지구에 미치고 있는 위협적인 영향력으로 인해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 구분이 제안되고 있다. 인류세가 아직 공식적으로 승인된 것은 아니지만,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다수의 학자들은 인류세의 도입에 공감하고 있다.
지질학적 시대 구분을 위해서는 지표가 될만한 근거가 필요하다. 인류세의 지표는 방사성 물질, 플라스틱 화석, 우리가 먹고 버린 동물의 뼈 같은 것들이 있다. 미래의 인류가 오늘날의 지층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거기에는 우리가 한 번 사용하고 버린 플라스틱, 공장식 축산으로 인해 일상이 되어 버린 육식의 결과로 발생한 동물의 뼈가 다수 발견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반감기가 수 십만 년에서 수 백만 년에 이르는 방사성 물질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플라스틱 폐기물은 이미 암석화 되기 시작했고, 플라스티글로머레이트(plastiglomerate)라는 이름도 얻었다. 미세먼지, 미세플라스틱, 방사능, GMO, 유해화학물질 등 다양한 위험요인들이 인간뿐 아니라 생태계의 모든 영역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위협들은 현재적으로 개인에게 밀접하게 경험되지 않고 있으며, 갑작스러운 삶의 변화를 일으키지도 않고, 비도덕적이라고 여길 만한 구체적인 연결고리가 인식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인류세를 도래하는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일회용 플라스틱을 분별없이 사용하고, 탄소 배출에 대해서도 무감각하다.
인류세와 기후변화만으로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이야기를 다양하게 풀어낼 수 있다. 경제, 정치, 국방, 보건, 교육, 정의, 윤리, 종교의 문제가 모두 여기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기후변화와 환경문제가 현대 사회를 보는 눈이라는 것을 뜻한다. 교회와 신학은 시대 안에 머무를 뿐 아니라 시대를 앞서 가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창조신학이나 근본주의 신학과 같이 자신들만의 고립된 영역을 구축하게 되고 그 결과 사회적 영향력을 상실할 뿐 아니라 기독교의 가치를 훼손시킬 수도 있다.
인류세의 현실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목회자로서 우리들의 상식과 현실 인식은 어느 수준에 머물러 있는가? 기후변화와 생태계 문제는 자연, 사회, 영성의 영역을 포괄하며, 이 세 영역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생태위기의 자연-사회-영성적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의 실존을 이해하는 일에 필수가 된 것이다. 현세를 규정하고 지배하는 권력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구시대적 세계관 속에 매몰되어 어느새 반지성주의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또한 생태위기에 대한 인식과 인류세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공중권세 잡은 세력의 작동방식과 그것을 전복시키는 평화와 생명의 하나님 나라 복음은 추상적인 교리에 머무르게 될 수도 있다.
기후변화, 방사능, GMO, 미세플라스틱으로 인해 더 이상 평안을 선포할 수 없는 인류세의 위기 앞에서 우리가 선포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어떤 것일까?
먼저 우리는 생태위기의 현실과 인류세의 도래를 죄의 지배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 로마서는 악의 구조적 성격에 주목한다. 악은 사탄의 지배를 지지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항하는 체제와 조직 그리고 그것을 추종하는 개인의 관점에서 파악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악은 서로 깊이 연결되어 하나님 나라에 저항한다. 폭스(M. Fox)는 악의 반대말은 선이 아니라 거룩한 것(the Sacred)라고 말하며, 헤셸(J. Heschel)도 악에 대한 성서적인 대답은 거룩함(the Holy)라고 말한다.
생태위기가 단순히 과학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자연세계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장 일상적인 것조차 정치적인 것이 되어버린 이 시대에 우리의 호흡과 음식까지도 정치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예로 우리의 식사기도를 생각해보자. 우리가 당연하게 먹는 수많은 농산물이 얼마나 많은 농민들의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는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세계적으로 수많은 농민들이 석유화학에 기반하고 있는 산업농법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기까지 고통 받고 있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또한 우리가 먹는 돼지가 평생 햇빛 한 번 못 보고 발목까지 차오르는 분뇨와 악취 속에서 짧은 인생을 살다가 죽는 공장식 축산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해본 적도 없을 것이다. 이런 것에 무관심한 식사기도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헤셸(Heschel)은 홀로코스트를 언급하며, 선함의 반대는 악이 아니라 무관심이며, 악에 대한 무관심은 악 그 자체보다 더 나쁘다고 말한다. 여기서 굳이 아렌트(H. Arendt)의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식탁은 이런 음식들로 채워진 식탁이 아닐 것이다. 생명과 평화가 아닌 죽음과 폭력으로 생산된 음식으로 채워진 식탁 앞에서 아무 일 없던 듯이 평소처럼 감사의 문구로 채워진 기도를 드릴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고 말하기에 우리 모두는 이미 그렇게 기도하며 무감각하게 살아가고 있다. 사실 이런 무감각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고 어느 정도 학습되어 있다. 우리 대부분이 블러드 다이아몬드를 둘러싼 이야기를 잘 알고 있지만 평생 한 두 번 살 법한 일반인들에게 다이아몬드 때문에 가족을 잃고 손발이 절단되는 사람들의 파괴되는 삶은 간과되기 쉽다. 이처럼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들의 재료가 되는 자원의 채굴에서 생산, 유통, 폐기의 전 과정에 대해 우리는 잘 모른다. 어쩌면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일 가능성이 더 크다. 혹시 그 모든 과정 속에 비윤리적인 부분들이 많다고 하더라도 내 손에 들려 있는 최첨단 기기에는 그런 흔적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이를 외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도 않다.
악은 평범하며 일상적이다. 그래서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죽음과 파괴의 과정과 그 결과에 대해 우리는 계속 무지한 채로 남아 있다. 그리고 끊임없이 그 죽음과 파괴로 인한 결과물을 소비하며 그 체계를 유지하고 확대해 가고 있다. 자본이 스스로를 증식해 가는 것처럼 우리 시대의 악도 끊임없이 자신을 확대재생산 되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주변에서 가장 흔하게 접하는 반응은 ‘불편하게 어떻게 그런 걸 다 고려하냐’는 것이다. 이처럼 생태위기 시대에 제기되는 악의 문제는 ‘개인의 불편함’ 앞에 가려진다. 자신의 불편함을 이유로 타자의 죽음에 대한 무관심을 합리화한다. 그러나 나 자신조차도 이 불편함에 익숙하지 않다. 현실적으로 개인이 이러한 문제에 개별적으로 대처하기는 쉽지 않다. 혼자 채식을 할 수도 없고, 혼자 윤리적 소비를 하며 공장식 축산과 석유기반의 산업농업을 거부할 수 없다. 그러다가는 사회 안에서 관계적으로 고립되거나 혼자 지치기 쉽고, 머지않아 현실과 타협하고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가기도 쉽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의 실천을 포기하거나 현실에 무관심 해질 것이 아니라, 개인이 대응하고 실천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버린 현실을 야기한 구조와 체제에 저항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런 대응은 우리에게 생소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은 완전한 의를 행할 수 없고 죄의 문제를 개인적으로 해결할 수도 없다. 구원 받은 성도라 해도 죄 짓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앙의 길을 걷는 것을 포기하고 세상으로 돌아가지는 않는 법이다. 오히려 기독교 신앙은 성도들이 거기서 멈추지 않고 죄의 세력에 저항하며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인류세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여정도 이와 같다. 생태위기를 둘러싼 악의 세력과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구조적인 문제를 직면하고 그것에 대항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완벽하게 실천하기도 어렵고, 매일 매일 원하지 않는 위협을 생태계와 원근의 이웃에게 가하며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생태적 신앙은 우리가 여기에 무감각해지지 않고, 생태적 영성을 추구하며 회개와 저항의 삶을 살아가도록 해준다. 생태위기 시대에 교회의 사회적 역할과 영성적 가치는 생태영성을 통해 성취될 수 있다. 죽음과 파괴에 동조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현 체계와 구조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생명과 평화를 선포할 길을 모색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개개인의 생태적 회심이 선행되어야 한다. 생태적 회심은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삶을 생명과 평화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며, 동시에 타자의 생명을 가치 있게 여기도록 만들어 준다.
십자가, 거룩함, 영성과 같은 기독교의 가치들은 불편함, 자기 제한, 절제, 단순함 등과 연결되며 사막 수도자들의 지혜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생태적 회심과 생태적 영성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이다. 구조적인 문제이기에 개인이 혼자 맞설 수 없고, 교회가 힘을 모아 맞서야 하는 시대적 사명이기도 하다. 지금 누리고 있는 편안함을 포기하고 불편을 감수해야 하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사명감이 없으면 쉽게 실천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문제이다.
* 기독교환경교육센터 살림에서는 우리 모두가 성찰적 신앙과 삶을 살기 원해, 온라인 살림신앙공부를 해보려 합니다. 기간을 정해놓고 하는 것은 아니나, 때때로 '김신영의 살림컬럼'을 읽고 주변 분들과 살림신앙을 키워가는 공부를 하시게 되길 희망해봅니다.
그 첫번째 "인류세와 기독교신앙"입니다. 이 글을 함께 읽고, 다음 질문에 따른 생각 나눔을 해보시거나, 이글의 댓글로 나누신 이야기나 자신의 생각을 적어주셔도 좋겠네요. 우리의 살림신앙의 자라남을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성찰을 위한 살림질문>
1. 홀로세와 인류세를 구분짓는 것들은? 공통점은?
2. 생태위기 시대, 인류세의 현실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죄를 어떻게 고백할 것인가?
3. 생태위기를 둘러싸고 있는 악의 세력에 저항하는 일상의 삶은 어떤 것일까? 그 삶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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