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스케치] 좋은 정책은 사랑이 공공의 영역에 드러난 모습입니다
―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국제 기후정의 컨퍼런스에서 듣고 묻고 돌아본 것
2026년 10월 1일, 이화여자대학교 대학교회에서 열린 국제 기후정의 컨퍼런스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화석연료 없는 미래를 향한 정의로운 전환》에 다녀왔습니다(이전 공지 : https://eco-christ.tistory.com/2809).
예배당 안에는 기후위기라는 거대한 현실 앞에서 더는 머뭇거릴 수 없다는 절박함과, 그래도 우리가 함께 길을 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함께 흐르고 있었습니다. 살림도 신앙과 교육이 이 문명사적 전환의 시기에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지 배우고 묻기 위해 자리를 함께했습니다.
화석연료 체제의 종식은 도덕적 결단입니다
첫 번째 기조발제에서는 필리핀의 기후정의 활동가가 국제 기후협상 현장에서 마주한 현실을 들려주었습니다. 기후위기의 최전선에 있는 나라와 공동체는 이미 삶의 터전을 잃고 있는데, 역사적으로 가장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한 부유한 나라들과 거대 화석연료 기업들은 여전히 책임을 미루고 있습니다. 국제회의에서는 소수점 단위의 감축률과 목표 연도가 논의되지만, 그 숫자 뒤에는 물에 잠기는 마을과 무너지는 생계, 고향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있습니다.
그는 화석연료 체제의 종식을 과거의 노예제 폐지 운동에 견주어 말했습니다. 오랫동안 사회를 떠받쳐온 제도라 해도, 그것이 누군가의 삶과 존엄을 짓밟는다면 끝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화석연료 종식 역시 에너지원 하나를 바꾸는 기술적 선택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문명을 계속 허용할 것인가를 묻는 도덕적 결단이라는 뜻으로 들렸습니다.
기후위기는 모두에게 똑같이 닥치지 않습니다. 위기를 일으킨 책임이 가장 적은 이들이 가장 먼저, 가장 깊이 고통받습니다. 그러므로 정의로운 전환은 단지 탄소배출량을 줄이는 일이 아니라 생태적 부채를 인정하고, 기후재난의 최전선에 선 공동체와 원주민, 여성과 청년의 목소리를 전환의 중심에 놓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기후정의란 결국 “누가 더 많이 책임져야 하는가”, “누구의 목소리를 먼저 들어야 하는가”를 묻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환의 과정에서 또 다른 희생지대를 만들지 않으려면
두 번째 기조발제자인 김현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기획위원은 한국 사회의 구체적인 현실로 우리를 이끌었습니다.
1990년대 석탄산업 합리화 조치 이후 강원도 폐광지역이 겪은 공동체 붕괴, 그 대안으로 들어선 카지노 산업이 남긴 상처, 그리고 지금 충남 태안과 당진의 석탄화력발전소 폐쇄 과정에서 불안을 겪는 노동자와 지역 주민들의 현실이 이어졌습니다. 내연기관차에서 전기차로 전환하는 과정에서도 일부 부품업체와 노동자들은 일자리와 삶의 기반을 잃을 위험에 놓여 있습니다.
석탄발전소를 재생에너지 설비로 바꾸고 내연기관차를 전기차로 교체한다고 해서 저절로 정의로운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전환의 비용을 노동자와 주민에게 떠넘긴다면, 우리는 탄소는 줄이면서 또 다른 희생지대를 만들게 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기술의 교체만이 아니라 지역과 삶의 전환입니다. 노동자와 주민이 전환의 대상이 아니라 계획하고 결정하는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한 산업에 의존하던 지역경제를 돌봄과 교육, 농업과 문화, 재생에너지와 지역서비스 등으로 다양하게 바꾸고, 성장의 속도가 늦어져도 누구나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을 갖추어야 합니다. ‘탈성장’이라는 말도 단순히 가난해지거나 모든 발전을 멈추자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끝없는 생산과 소비를 행복의 기준으로 삼아온 사회에서 벗어나, 적게 소유해도 관계와 돌봄이 풍성한 삶, 지역 안에서 자원과 부가 순환하는 삶을 다시 상상하자는 제안이었습니다.
교회는 성장주의를 넘어설 수 있을까요
두 발제를 들으며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온 두 가지 질문을 드렸습니다.
첫 번째는 한국 교회의 성장주의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오랫동안 교인 수의 증가와 대형 건축, 재정의 확장을 하나님의 축복처럼 여겨왔습니다. 물론 성장 자체가 모두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더 크고 더 많이 소유하는 일을 성공의 증거로 삼는 동안, 교회도 화석연료 문명을 떠받쳐온 성장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자신의 성장 욕망과 기득권을 성찰하지 않은 채 사회를 향해 탈성장과 정의로운 전환을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먼저 던지는 질문입니다. 교회가 가진 공간과 재정, 인적 자원을 교회만을 위한 소유물로 두지 않고 지역사회의 생명을 살리는 ‘생태적 공유지’로 열 수는 없을까요? 더 크게 짓는 대신 이웃에게 공간을 내어주고, 더 많이 쌓는 대신 기후 취약계층과 나누며, 교회의 지붕과 주차장과 마당을 햇빛과 빗물, 나무와 사람을 위한 자리로 바꿀 수는 없을까요?
교회가 탈성장을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의 성공 기준부터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얼마나 커졌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나누었는가, 얼마나 소유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생명을 살렸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작은 실천을 넘어 세상을 바꾸는 시민을 길러내려면
두 번째는 환경교육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텀블러를 사용하고, 분리배출을 잘하고, 전등을 끄고, 일회용품을 줄이자고 가르쳐왔습니다. 이런 실천은 여전히 소중합니다. 생활이 달라지지 않은 채 사회만 바뀌기를 요구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인의 실천만 강조하다 보면 기후위기의 책임이 시민 개개인에게 있는 것처럼 보이기 쉽습니다. 열심히 분리배출하면서도 왜 기업은 끊임없이 일회용품을 생산하는지 묻지 못하고, 전기를 아껴 쓰면서도 에너지 정책이 누구의 이익을 중심으로 결정되는지 살피지 못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선한 실천이 오히려 구조의 책임을 가리는 알리바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살림이 해온 환경교육도 이 질문 앞에서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의 교육은 좋은 소비자를 만드는 데 머물고 있지 않은가. 학습자들이 자신의 일상과 지역 노동자의 삶, 에너지 정책과 공공예산, 법과 제도의 문제를 연결해 바라보도록 돕고 있는가. 불편함을 조금 감수하는 시민을 넘어 질문하고 토론하며 정책의 변화를 요구하는 시민을 길러내고 있는가.
생활실천과 구조 변화는 둘 중 하나를 고르는 일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작은 실천이 공동체의 약속이 되고, 공동체의 약속이 제도와 정책을 바꾸는 힘으로 이어지게 해야 합니다. 환경교육은 바로 그 연결을 돕는 교육이어야 합니다.
좋은 정책은 사랑이 공공의 영역에 드러난 모습입니다
점심 식사 후 열린 다종교 1차 토론회에서는 오전의 문제의식에 종교인들이 각자의 전통과 현장의 언어로 응답했습니다. 강의를 마친 이화여대 학생들이 본당 뒤편을 채웠고, 젊은 눈빛이 더해진 예배당에는 진지하면서도 따뜻한 긴장감이 흘렀습니다.
가장 마음에 오래 남은 문장은 플레처 하퍼 그린페이스 대표가 전한 말이었습니다. “좋은 정책은 사랑이 공공의 영역에 드러난 모습입니다.” 사랑을 흔히 개인의 따뜻한 마음이나 선행으로 생각하지만, 사랑이 공적인 책임으로 확장되면 정책과 예산이 됩니다. 폭염 속에 홀로 있는 이웃을 염려한다면 그 마음은 에너지 취약계층을 보호하는 제도로 나타나야 합니다. 석탄발전소 노동자의 삶을 걱정한다면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고용과 재교육 예산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미래세대를 사랑한다면 화석연료 기업에 공적 자금이 계속 흘러가도록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그는 대학생들의 캠퍼스 점거에서 시작된 화석연료 투자 철회 운동이 세계 종교계와 금융기관의 참여로 확산된 과정을 들려주었습니다. 돈의 흐름을 바꾸는 일은 우리가 무엇을 믿고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를 공적으로 드러내는 행동이었습니다. 신앙은 마음속의 믿음에만 머물 수 없습니다. 교회의 예산이 어디로 흐르는지, 연기금과 금융자산이 어떤 산업에 투자되는지, 우리가 지지하는 정책이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희생시키는지를 살피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불타는 집에서 먼저 깨어나기
서재영 성철사상연구원장은 법화경의 ‘삼계화택(三界火宅)’을 이야기했습니다. 온 세상이 불타는 집과 같다는 비유입니다. 지금의 기후재난은 자연이 제멋대로 일으킨 재해가 아니라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지른 불이라는 말이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빨리 소비하는 삶, 새로운 기술이면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정책의 변화도 오래가기 어렵습니다.
물론 마음의 변화만으로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욕망의 방향을 바꾸지 않은 채 제도만 고치려 한다면, 새로운 제도 역시 오래된 탐욕에 붙잡힐 수 있습니다. 마음의 전환과 사회구조의 전환은 서로 떨어진 일이 아닙니다. 종교는 3·1운동과 민주화운동, 새만금 삼보일배와 탈핵 순례처럼 교리를 넘어 생명과 공공의 대의를 위해 함께 걸어온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서로의 차이를 지우는 연대가 아니라, 각자의 깊은 신앙과 수행에서 길어 올린 힘으로 함께 불을 끄는 연대일 것입니다.
예언자는 미래를 오늘 살아내는 사람입니다
17년째 화학비료와 농약 없이 흙을 일구어온 조경자 수녀의 이야기는 더욱 구체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예언자는 미래를 잘 예측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오늘 자신의 몸으로 먼저 살아내는 사람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기후정의를 외치면서 우리의 건물과 식탁, 이동 방식과 에너지 사용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 말은 힘을 얻기 어렵습니다. 성당과 교회의 지붕에 태양광을 올리고, 흙을 살리며, 적은 에너지로도 기쁘고 충만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실제로 보여주는 일이 필요합니다. 작은 실천은 구조 변화와 대립하지 않습니다. 삶으로 증명된 작은 실천은 사람들의 마음과 문화를 움직이고, 마침내 제도를 바꾸는 힘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작은 실천에만 머물지 않고 그것을 공동체와 사회의 변화로 이어가는 일입니다.
회개는 삶의 방향을 돌리는 일입니다
장윤재 이화여대 신학대학원장은 화석연료 체제를 창조주가 모든 생명과 맺으신 언약을 파괴하는 ‘죄의 구조’로 설명했습니다. 화석연료 문명은 끝없는 이윤과 착취를 정상적인 삶의 방식으로 만들어왔습니다. 그 구조 안에서 우리는 편리함을 누렸고, 때로는 그 편리함이 누구의 땅과 노동과 생명을 희생시켰는지 보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몇 가지 착한 소비를 더하는 데 그치지 않는 회개입니다. 성서에서 회개는 잘못을 후회하는 감정에 머물지 않고, 가던 방향을 돌려 새로운 길로 들어서는 일입니다. 재생에너지로의 전환 또한 대기업의 새로운 시장과 이윤을 위한 사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역 주민과 노동자가 생산과 의사결정의 주인이 되는 에너지 민주주의, 가장 취약한 이들의 삶을 먼저 살피는 돌봄의 정의로 나아가야 합니다.
교회 역시 사회에 변화를 요구하기 전에 자신이 가진 자산과 공간, 에너지 사용 방식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화석연료 산업과 연결된 투자를 철회하고, 교회 건물과 땅을 지역사회의 돌봄과 생태전환을 위해 나누는 일이 교회의 회개가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세계는 이미 작은 자리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오후 1차 토론회가 끝난 뒤 다음 일정을 위해 대학교회를 나섰습니다. 이어질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못한 아쉬움이 컸지만, 몇 가지 질문은 마음속에서 더욱 선명해졌습니다.
교회는 성장주의를 내려놓고 생명을 위한 공유지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의 환경교육은 개인의 선한 실천을 넘어 공동체와 정책을 변화시키는 시민을 길러내고 있을까요? 우리는 기후정의를 말하면서 정작 자신의 공간과 재정, 생활방식은 안전하게 지켜두고 있지 않은가요? 이 질문들에 단번에 답하기는 어렵습니다. 교회의 오래된 관행과 사회의 견고한 구조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거대한 변화만 기다리며 오늘의 작은 걸음을 미룰 수도 없습니다.
교회 지붕에 햇빛을 담는 일, 마당 한쪽을 작은 생명의 숲으로 내어주는 일, 폭염과 한파 속 이웃의 안부를 묻는 일, 교회의 예산과 자산이 어디로 흐르는지 살피는 일, 지역의 노동자와 주민을 전환의 주체로 세우는 일, 개인의 실천을 공동체의 약속과 정책 제안으로 이어가는 일. 다른 세계는 바로 그런 자리에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말은 현실을 외면하는 낙관적인 구호가 아닙니다. 지금의 세계가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져 있음을 인정하고, 그 질서와 결별하겠다는 다짐입니다. 동시에 생명을 살리는 세계를 오늘 여기에서 미리 살아보겠다는 약속입니다.
살림도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계속 던지겠습니다. 우리가 하는 교육이 사람의 생활만이 아니라 공동체와 제도를 바꾸는 힘으로 이어지도록, 교회가 소유의 울타리를 낮추고 마을의 생태적 공유지가 되도록, 신앙의 고백이 예산과 공간, 에너지와 돌봄의 방식으로 드러나도록 배우고 실천하겠습니다.
좋은 정책은 사랑이 공공의 영역에 드러난 모습입니다. 그리고 좋은 신앙은 그 사랑을 오늘의 삶으로 살아내는 모습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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